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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9.1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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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영국 정신적 지주’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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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관이 일반에 공개된 지 추모객들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홀을 방문해 조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고(故)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관이 일반에 공개된 지 추모객들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홀을 방문해 조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타계는 왕실 가족뿐 아니라 영국과 전 세계에 큰 슬픔이었다. BBC 뉴스 앵커 휴 에드워즈가 “엘리자베스 2세 시대는 끝났습니다(And so ends the Second Elizabethan Era)”고 말한 것처럼 여왕의 서거는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각각의 국가 혹은 문화권에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구분한다. 한국의 역사는 조선, 고려, 신라 등 ‘왕조’를 기준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역사는 ‘시대’로 구분되곤 한다. 아마도 영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시대는 1837~1901년 빅토리아 여왕 시대일 것이다. 대영제국이 가장 크게 번성했던 시기였다.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었고 혁신과 발명의 시대였다. 1714~1830년 조지 왕조 시대 영국에서는 예술과 문화가 꽃피었고,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와 같은 철학자들이 거대한 철학적 질문을 시작했다. 1558~1603년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는 영국 역사의 황금기로 일컬어진다.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기 시작했고, 영국 해군이 바다를 지배했다.

 

19일 국장, 윤석열·바이든 대통령 참석

 

 

 

미래의 역사가들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현재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각각의 시대에는 수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후대인들은 그중 아주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평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1952년부터 2022년까지 70년간 이어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시대는 극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여왕이 1952년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70개 이상의 해외 영토를 포함한 영국 제국을 통치했다. 이때 전 세계 인구는 약 25억 명이었고 영국의 총리는 윈스턴 처칠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이었고 한국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1952년 아버지 조지 6세가 서거했을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프리카에 있었다. 여러 통의 전화 연결을 통해 어렵게 왕실의 연락을 받은 그는 아버지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길고 슬픈 귀갓길에 올랐다. 하지만 70년 후 여왕이 서거했을 땐 그녀가 있던 고향 스코틀랜드 밸모럴성의 라이브 영상을 세계 어디서나 누구나 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한 지 5년이 되어서야 세계 첫 컴퓨터가 발명되었고, 9년이 되어서야 최초의 인류가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또 첫 번째 CD가 발명되고 휴대전화 사용이 시작되기 30년 전부터 그는 여왕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가 끝날 때쯤 사람들은 손안에 들어가는 작은 기기의 유리 화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

 

이 모든 변화의 시간 동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영국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치에 직접 관여를 했거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질병이나 기근을 극복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직접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여왕으로서의 역할은 분명히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역할은 ‘배의 닻(anchor)’에 비유할 수 있다. 지난 70년 동안 영국은 전 세계와 더불어 점점 더 거칠어지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배와 같았다.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의 시간 동안 여왕은 움직이지 않는 바위에 정착한 닻처럼 의연하게, 흔들리는 배가 너무 멀리 가지 않고 영역 안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사라진다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으며 동요하지 않는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keep calm and carry on)’는 영국인의 모토는 바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일지 모른다. 이 말은 마케팅을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문구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매우 위안이 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왕의 존재가 영국과 많은 영연방국에 그동안 주었던 의미도 같은 것이다.

 

영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정치적 사안이 지나치게 되거나, 정부가 너무 극단적이거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한다면 여왕이 개입해서 모든 상황을 다시 안정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1700년대 이후 영국에서 어떤 군주도 영국의 법을 거부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국왕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높은 지식과 오랜 경험을 갖고 있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권위자가 언제든지 잘못된 일에 개입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만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위로가 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바로 그런 권위자였다. 영국 정부와 영국 국민에게 여왕은 그들이 삶에서 발을 헛디디거나 비틀거릴 때 지켜봐 주고 손잡아 주는 부모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정치에 직접 관여한 적은 없지만, 그는 통치 중 두 번 총리를 임명했다. 1957년 앤서니 이든 경이 총리직을 사임하고 해럴드 맥밀런이 임명되었을 때와 1963년 맥밀런이 사임하고 알렉 더글러스흄이 총리로 임명되었을 때다. 두 경우 모두 여왕은 정당의 정책에 따라 보수당 수석 당원들의 추천에 의해 총리를 임명했다.

 

또한 여왕의 지도 하에 영국 왕실은 영국군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왔다. 그의 아들 앤드루 왕자가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헬리콥터를 직접 조종했고 손자 해리 왕자가 이라크에 참전하기도 했다.

 

아마 여왕의 통치 기간 중 가장 논쟁이 되었던 문제는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북아일랜드 영토 문제일 것이다. 1998년까지 일어난 북아일랜드분쟁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양측에 의해 3600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는 2011년 4일간의 일정으로 영국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여왕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념관을 방문했고 더블린성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헌화를 하고 게일어로 연설했다.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은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 역사에서 북아일랜드 분쟁이 실제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종종 여겨지고 있다. 여왕의 통치 초기에 북아일랜드 분쟁 문제에 대한 여왕의 실제 의견을 알 순 없다. 하지만 2011년에 결정적으로 분쟁을 끝내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서거하자 아일랜드 정부는 조기를 게양했다. 20년 전만 해도 그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행동이다.

 

 

여왕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여왕은 윈스턴 처칠, 넬슨 만델라, 테레사 수녀와 차를 마셨고, 프랭크 시내트라, 소피아 로렌, 메릴린 먼로와 악수했으며, 존 F 케네디와 저녁을 먹었다. 비틀스가 라이브로 공연하는 것을 직접 관람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 수업에서 배운 과거와 우리의 현재를 연결시켜 주었고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존재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가 영원히 곁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잊기 시작했다.

 

마크롱 “전 세계인에 단 하나뿐인 여왕”

 

이제 여왕의 죽음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아들 찰스 3세의 즉위로 이제 영국은 ‘캐롤라인 시대’를 맞게 됐다. 찰스 3세 왕은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73세에 국왕이 된 그는 어머니처럼 거의 평생을 바쳐 국가 원수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세자로서 50년 이상 공적인 생활을 해왔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해왔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자애롭게 지켜보는 더 높은 권위의 공정한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대신 찰스 3세 왕은 엘리자베스 2세 외에 다른 군주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세상에서 매우 어려운 도전을 하며 자신만의 통치 방식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찰스 3세는 또한 군주제에 대한 지지가 점점 더 낮아지는 시대를 통치하게 될 것이다. 영국 및 영연방국가들은 군주제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는 꼭 사람들이 찰스 3세를 좋아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만 비롯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동안은 여왕 덕분에 군주제가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같은 군주를 다시 볼 가능성은 수세기 동안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의 재임 시기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과 이를 대하는 여왕의 성품으로 인해 영국과 세계에 꼭 필요한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한다. “영국인에게 그녀는 한 나라의 여왕이었습니다. 전 세계인에게 그녀는 단 하나뿐인 여왕이었습니다.” (To you, she was your Queen. To us, she was The Queen.)[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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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배의 닻’ 역할, 70년간 순탄한 항해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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